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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과학기술 강국이 되려면

본 글은 중앙일보 조인디의 편집을 거쳐 https://joind.io/market?id=798 에 게재되었습니다.


일본 과학자 요시노 아키라가 2019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며 일본은 2년 연속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 이로써 일본 국적자의 노벨상 수상은 25명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GDP(국내총생산)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율은 세계 정상급입니다. 2016년 기준 국내총생산 대비 한국의 연구개발비 비중은 4.2%로, 일본(3.1%), 독일(2.9%), 미국(2.7%)에 비해 훨씬 높은 수치를 기록하며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를 기록했습니다. 이 비율은 2017년에 4.55%까지 올라갔고 한국의 연구개발 예산 규모는 절대값 비교에서도 세계 5위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년 5만개가 넘는 정부 R&D(연구·개발) 과제의 성공률이 무려 98%에 달한다는 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7월 26일 제 1회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이 점을 지적했습니다. 선진국의 기초과학 연구 성공률은 20% 대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이 98%의 연구 성공률의 숫자를 나타내는 것은 한국의 시스템이 예산을 따낸 후 과제 성공이라는 실적을 안전하게 잘 보고해야 다음 예산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이 과학기술 강국이 되려면 먼저 한국의 의사결정 시스템이 ‘과학적’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스템은 얼마나 과학적일까요?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많은 기업과 기관에서 이루어지는 회의는 얼마나 과학적일까요? 훌륭한 디자이너가 창조한 멋진 디자인은 과연 과학적인 과정을 거쳐 채택되거나 탈락될까요? 안타깝게도 경영진과 상사의 취향과 감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의 상당 부분은 ‘귀납적’ 과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집니다. 흔히 과학을 떠올릴 때 연역적인 느낌이 들 수 있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과학은 무수한 귀납적 실험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위해서는 운(Luck)이 중요한 역할을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과학을 책으로 공부할 때는 개념을 익히고 공식을 외워야 하니 연역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과학의 실상은 매우 귀납적인 벽돌들의 연결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훌륭한 연구는 과거의 지식을 뒤엎는 새로운 발견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논문을 쓸 때 과거의 결론을 귀무가설(歸無假說)로 놓습니다. 귀무(歸無)는 없음으로 회귀한다는 것, 즉 버린다는 뜻입니다. 기존 연구 결과를 뒤집는 새로운 가설을 세우는 것이 과학의 출발입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연역적’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기업의 의사결정은 경영방침에 영향을 받고, 지휘체계에 의해 통제됩니다. 디지털 화폐와 크립토 금융을 맞이하는 은행의 의사결정 시스템은 ‘블록체인은 장려하되 암호화폐는 규제한다’는 국정기조를 피할 수 없습니다.


최근 마케팅 분야에서 각광받고 있는 그로스해킹(Growth Hacking)은 귀납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그로스해킹은 마케팅 전략을 연역적으로 수립하기보다 실제 서비스를 실험하고 조금씩 개선해 가면서 가파른 성장 곡선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로스해킹에 대한 여러 가지 최신 기법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결국 핵심은 마케팅의 의사결정권을 실무자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그로스해킹을 추진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기업문화라고 이야기합니다. IT 실무자에게 실험과 의사결정의 권한을 주지 않고서는 그로스해킹을 진행할 수 없고 근본적인 빅데이터 전략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요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AI(인공지능)도 귀납적 과정을 기반으로 합니다. 딥러닝(Deep Learning)의 핵심은 사람이 직관으로 알고리즘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가 인공신경망을 바탕으로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시도해 보는 것에 있습니다. 인공지능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는 강화학습은 컴퓨터에게 무수한 실험을 시키는데 그 결과를 인센티브 보상과 연결하여 최상의 전략을 찾아가는 것으로 귀납적 과정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알파고가 사람이 쌓아 온 지식체계에 갇혀 있었다면 이세돌 9단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세돌 9단은 알파고에게 3번째 바둑대결에서 패배한 후 ‘이세돌이 패한 것일 뿐, 인간이 패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결국 알파고도 인간이 창조한 것으로, 이 장면의 본질은 인간이 의사결정과 전략 수립에서 귀납의 힘이 연역의 힘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파괴적으로 깨닫게 된 것에 있습니다.



한국이 과학적인 국가가 되려면 귀납적 사고와 귀납적 의사결정 시스템에 적응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일목요연’에 비해 ‘중구난방’을, ‘진두지휘’에 비해 ‘자율결정’을, ‘질서정연함’에 비해 ‘무질서함’이라는 단어에 적응하는 철학적 용기가 필요합니다. 과학에서 기존 선배 연구자들의 결론을 귀무가설(歸無假說)로 놓는다고 해서 지금까지 선배 연구자들의 쌓아 온 공헌의 가치까지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제시하는 새로운 결론도 언젠가는 후배 연구자들에 의해 다시 귀무가설로 놓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과학의 지속가능한 체계를 이어갑니다.


매 정부마다 규제 철폐를 외쳐왔지만, 귀납적 사고가 중요해지는 지금 시대에 있어서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탈중앙화’는 단지 블록체인 기술 영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 혁명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의사결정 시스템과 사회 체계에 철학적인 도전을 던집니다. 한국의 인재들과 기업들이 보다 자유롭게 새로운 실험에 도전할 수 있는 과학적인 국가문화를 가지게 되면 한국은 보다 과학적인 국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과학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의식체계가 ‘과학적’인 시스템으로 진화할 수 있으면 대한민국의 과학기술도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귀납적 사고가 중요해지는 시대에서 한국은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국가자본주의에 빅데이터와 AI 기술을 결합하여 중앙 통제력이 더욱 강해지는 국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같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더라도 새로운 개념의 작은 정부를 구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위대한 시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시민들에게는 평화로운 역동성이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작은 지분의 정부가 오히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지분을 시민들이 채워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시민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김문수 aSSIST-CKGSB Top-tier EMBA 및 크립토MBA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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